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와 동여도(東輿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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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90,716회 작성일 18-07-31 11:15본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와 동여도(東輿圖)
李相泰(이상태)
1. 고산자의 출생지(出生地)
2. 고산자의 생몰연대(生沒年代)
3. 고산자의 거주지(居住地)
4. 고산자의 당호(堂號)
5. 고산자의 전국답험설(全國踏驗說)
6. 고산자의 옥사설(獄死說)
7. 고산자의 신분(身分)
8. 고산자와 동여도
고산자 김정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고산자의 출생지·거주지·생몰연대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다. 더구나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제작하였고 또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어떻게 썼는지는 더욱 모른다. 대동여지도라는 조선 지리학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긴 고산자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의문 사항이 많을까 ?
이것은 그의 빛나는 업적에 비하여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측과 억측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산자는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 등의 3대지지를 편찬하였고 청구도(靑邱圖),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3대지도를 제작하였음을 밝혀졌으며 그를 둘러싸고 얽혀있는 많은 의문 사항들이 밝혀지고 있다.
1. 고산자의 출생지
고산자의 출생지가 황해도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없다. 황해도 봉산설(說)이 유력하다. 그러나 황해도 토산(兎山)이 고산자의 출생지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쓴 최초의 지지가 동여도지인데 이 책의 편자(編者)에 "월성 김정호 도편(月城 金正浩 圖編)"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름 앞에 씌여진 지명(地名)은 본관(本貫)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김정호는 청도 김씨(淸道 金氏)가 아니라 월성 김씨 곧 경주 김씨(慶州 金氏)인 셈이다.
이러한 의심도 가지만 그러나 여도비지를 살펴보면 이 의문은 풀린다. 이 책은 그의 후원자였던 최성환(崔○煥)과 공저(共著)로, 편자를 살펴보면 "예성 최성환 성옥보 휘집(蘂城 崔○煥 星玉甫 彙輯), 오산 김정호 백원보 도편(鰲山 金正浩 伯元甫 圖編)"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로 본다면 예성은 충주(忠州)이고 오산은 청도이기 때문에 최성환은 충주 최씨이고 김정호는 청도 김씨이다. 그리고 고산자의 자가 백온(伯溫), 백원(伯元) 등이 있는데 백원(伯元)이 그의 자(字)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산자는 동여도지에서는 왜 "오산 김정호"라고 표기하지 않고 "월성 김정호"라고 했을까 ? 이는 대동지지 황해도(黃海道) 토산현조(兎山縣條)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린다. 토산의 옛 명칭이 월성이었다. 그러므로 고산자는 황해도 봉산 출신이 아니고 황해도 토산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2. 고산자의 생몰연대
고산자에 관한 기록이 희소하기 때문에 그의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병도(李丙燾)는 김정호가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까지 4대에 걸쳐 생존했다고 하였다. 그렇다. 고산자는 순조 34년에 청구도를 제작했으며 철종연간(哲宗年間)에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동여도를 제작하였으며 철종 12년에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고 고종 원년(元年)에는 대동여지도를 재간하고 대동지지를 썼기 때문에 이러한 단정은 사실에 부합된다. 그러나 이 정도는 미흡하다. 고산자의 생몰연대를 구체적으로 1804 ∼ 1866년이라고 지적한 연구자는 김양선(金良善)이다. 그러나 김은 고산자가 어떻게 생활했기 때문에 이렇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필자(筆者)는 대동지지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고산자가 고종 3년(1866)까지 생존했음을 밝혀냈다. 대동지지 권(卷)1 국조기년(國朝紀年) 고종조에는 민비(閔妃)가 고종의 왕비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왕들은 세자로 책봉된 후 세자빈을 맞았다가 함께 즉위하지만 고종은 세자 시절이 없이 바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가 없었다. 고종은 즉위하고 3년 후인 고종 3년(1866) 3월에 민씨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이 사실이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대동지지에도 기록하고 있으므로 고산자는 고종 3년(1866) 3월 이후까지 생존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친우였던 최한기(崔漢綺)가 1803년에 태어나서 1877년에 죽었다면 김양선이 지적한 1804년에 태어나서 1866년에 죽었다는 지적은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 고산자의 출생시기는 정확히 밝힐 근거가 없지만 그의 사망시기는 고종 3년(1866)이라고 확실히 지적할 수 있다.
3. 고산자의 거주지
김정호가 황해도에서 언제 서울로 이주했는지 알 수 없다. 고산자는 서울에 상경하여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고산자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정인보(鄭寅普)의 지적이 생생하다. 그는 고산자와 생전(生前)에 면식이 있었던 한세진(韓世鎭)의 대인(大人) 증언을 근거로 고산자가 만리재에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인보의 기사보다 앞서 1925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게재된 내용을 검토해 보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고산자의 유업(遺業)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허(遺墟)가 있는 남문(南門) 밖 약현(藥峴)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추진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본다면 고산자는 약현 부근에 살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대문(西大門)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매우 잘못된 사실이다. 왜냐하면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의 도성도(都城圖)를 펼쳐 들고 위치를 확인해 보면 만리재 너머가 바로 공덕리이기 때문이다. 공덕리는 남대문 밖이지 서대문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약현, 만리재, 공덕리는 서로가 지척의 거리이다. 조선광문회에서 기념비를 세우려고 추진한 점으로 미루어 상당한 고증이 있었으리라고 사료되며 고산자는 약현 부근에 거주했다고 생각된다.
4. 고산자의 당호
김정호는 고산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빈한했고 신분도 미천했다. 그러므로 그가 당호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동지지에 그가 인용한 65종의 사서(史書) 대부분은 최한기나 최성환에게서 빌려온 것이지 그가 소장했던 사서가 아닐 것이다. 오주(五洲)도 최한기가 많은 장서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당시에는 책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좀처럼 장서를 갖출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지구도(地球圖) 중간자(重刊者)가 태연재(泰然齋)라고 표기된 것은 고산자의 당호가 아니라 최한기의 당호이다. 오주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 의하면 최한기가 청(淸)의 장정병(莊廷○)이 간행한 지구도를 입수하여 그는 도설(圖說)은 제외하고 지구도만을 원래 양각(陽刻)인 것을 음각(陰刻)으로 김정호의 도움을 얻어 대추나무에 판각(板刻)하여 중간하였다. 그러므로 지구도의 중간자는 최한기이지 김정호가 아니다. 고산자는 지구도를 판각해 준 각수(刻手)이었지 중간자가 아니다. 태연재는 고산자의 당호가 아니라 중간자인 최한기의 당호이다.
5. 고산자의 전국답험설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백두산을 7회나 등정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고산자의 위대성을 드높이기 위하여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하였다. 이 사실은 조금만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통관계, 경제력, 체력, 맹수들, 어느 것 하나 가능성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굳혀 주는 것이다.
또 고산자가 정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전국을 세 차례나 두루 답사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다음 사료(史料)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자.
가) 癖於輿地之學, 博巧廣蒐(劉在建의 里鄕見聞錄)
- 여지학(곧 지리학, 지도학 등 땅에 관한 학문- 홈지기)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나) 金正浩 年自童冠 深留意於圖志 歲久搜閱 詳諸法之輪○ 每値靜閑時 確論求得比覽式簡便(崔漢綺의 靑邱圖題)
-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 여러 도법에 상세히 알아 매번 조용한 시간에 간편한 비람식을 확실히 얻어......(최한기의 청구도제문)
다) 余嘗有意於我東輿圖 如籌司奎閣之歲古家○○之餘 廣蒐而證定 參互群本 援據諸書 合以○輯 因謀諸金君百源 屬以成之(申櫶의 大東方輿圖序)
- 나는 일찍이 우리 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옛날 집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이 작업을 김백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
위 번역은 필자의 『한국 고지도 발달사』(혜안. 1999)에서 보충.
사료 가)는 유겸산(劉兼山: 곧 유재건 - 홈지기)이, 사료 나)는 최한기가, 다)는 신헌이 쓴 기록들이다. 이 세 사람은 고산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고산자가 전국을 두루 답사하였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다. 세 사람 모두 오로지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集大成)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산자는 博巧廣蒐(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거나 歲久搜閱(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했으며 廣蒐而證定(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하고 參互群本(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하여 청구도나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지 전국을 두루 답사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방동인(方東仁)의 지적처럼 프랑스의 단빌은 프랑스를 한 발자국 나가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6. 고산자의 옥사설
고산자의 옥사설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한 이병도(李丙燾)는 여러 가지 정황을 들어 설명하였다. 즉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지지 등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필자도 옥사설을 밝혀 보려고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추국안(推鞠案)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지만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 사실들은 그의 옥사설을 믿기 어렵게 한다.
첫째,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그가 편찬한 지지가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둘째,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를 옥에 가두고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하여 소각했다고 했는데 현재에도 대동여지도 판목 1매(枚)가 숭실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1931년의 경성대(京城大)에서 전시한 고도서전관목록(古圖書展觀目錄)에 의하면 판목 2매가 전시되었으며 그 외에도 특정인이 수십 매를 비장(秘藏)하고 있다고 부기(附記)하였고 김양선도 대동여지도 판목을 소유했었으며 또 최성환 후손들의 증언에도 대동여지도 판목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대동여지도 판목은 압수당하여 소각되지 않았었다.
셋째, 유재건(劉在建)이 이향견문록에서 죄인 김정호를 수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 권말에 고산자 얘기를 추기(追記)했으며 그 추기 시기는 고산자가 죽은 해 무렵이기 때문이다.
넷째, 고산자와 교유(交遊)하였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비변사 소장의 국가 기밀지도를 제공해 준 신헌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신헌은 중용(重用)되며 자기의 문집(文集)에 대동방여도 서문(大東方輿圖 序文)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을 기초로 한다면 고산자의 옥사설은 일제가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하여 조작한 사실인 듯하다.
7. 고산자의 신분
고산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전기(傳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고산자의 신분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다음 몇 가지 사실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첫째,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고산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에서 이인향선지가칭자(里仁鄕善之可稱者) 중 연몰무전(煙沒無傳)함을 한탄하여 이 책을 편찬하며 그들의 행적을 기리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책에는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 시(詩), 서(書), 화(畵) 등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行蹟)을 모았다. 그러므로 고산자도 하층계급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을 통해서 고산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서문 중 "因謀諸金君百源 屬以成之(해석은 위의 '고산자 전국답험설' 참고 -홈지기)"라고 하였다. 신헌은 순조 11년(1811)에 태어났고 김정호는 순조 3 ∼ 4년경에 태어났기 때문에 연령적으로는 김정호가 연상(年上)이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김정호를 김군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김정호는 신헌보다 신분이 훨씬 못미침을 알 수 있다. 즉, 연하자(年下者)가 연상자(年上者)에게 김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신분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같은 양반 출신이면 김공(金公)이라고 당연히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姓名)을 갖추어 적지 않고 성과 자(字)만을 적은 것도 신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산자의 자가 백원(伯元)인데 백원(百源)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정호는 평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김정호의 족보(族譜)가 없는 점이다. 청도 김씨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고산자는 봉산파(鳳山派)로 분류되어 있는데 6·25 동란으로 인하여 봉산파가 실계(失系)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6·25 동란과 관계없이 구보(舊譜)에는 등재되어 있어야 하는데 고산자는 족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는 김정호의 족보가 6·25 동란으로 실계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족보도 갖지 못했던 한미(寒微)한 평민 출신임을 뜻한다.
8. 고산자와 동여도
동여도는 23규(糾)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 가장 세밀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고산자의 작품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첫째, 동여도지 제 2책에 실려있는 서문을 들 수 있다. 고산자는 이 글에서 지도와 지지를 만들고 이를 동여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지지는 동여도지이고 지도는 동여도를 뜻한 것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의 작품이라고 분명한 간기(刊記)가 있고, 동여도에는 간기가 없지만 실제로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체제가 23규로 되어있고 매규(每糾)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다만 동여도가 대동여지도에 비해 약 7,400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판각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여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선행(先行)지도일 것이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에서 김백원(金百源)에게 위촉하여 동여도를 만들게 하였다고 했다. 김백원은 김정호이고 백원(百源)은 원래 백원(伯元)인 고산자의 자이다. 그러므로 동여도는 김정호의 작품이다.
셋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실려있는 지도표가 정밀하며 매우 흡사하다. 동여도에는 12개의 지도표가 사용되었는데 대동여지도에는 14개의 지도표가 사용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의 항목을 별도로 구분시켰지만 동여도에는 이 세 항목을 주현(州縣), 진보(鎭堡), 성지(城池) 항(項)에 포함시켰으므로 별 차이가 없다. 단지 동여도에는 파수(把守) 항이 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지도표를 뺐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지도표가 동여도의 것보다 간결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는 동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 동여도 제 13규 여백란(餘白欄)에 표기되어 있는 인릉(仁陵)의 위치가 헌릉우강(獻陵右岡)으로 되어 있다. 인릉은 순조의 능으로 원래 교하현(交河縣)에 봉안(奉安)했다가 철종 7년(1856) 2월에 헌릉우강으로 천봉(遷奉)이 결정되어 10월에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동여도는 철종 7년(1856) 이후에 제작되었으며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초간(初刊)한 것이 철종 12년(1861)이니 철종년간에 고산자를 제외하고 이렇게 상세하고 방대한 지도를 제작할 사람이 없으며 그러한 기록도 없지 않은가 ?
다섯째, 이병기(李秉岐)가 사조(思潮) 제1권 제 12호의 부록으로 수록된 한국명저해제(韓國名著解題)에서 동여도를 김정호의 작품으로 분류, 해설하고 있으며, 고대민족문화연구소(高大民族文化硏九所)에서 편찬한 한국도서해제(韓國圖書解題)에서도 이 작품을 고산자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동여도는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한 선행지도임이 분명하다.
고산자 김정호는 황해도 토산에서 출생하여 1804 ∼ 1866까지 활동했으며 그는 백원, 백온, 백원, 등 자도 자세하지 않고 당호도 갖지 못한 한미한 평민 출신이지만 죽는 그까지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도와 지지를 편찬하다 죽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였다. 물론 그는 옥사하지도 않았으며 백두산을 등정했다거나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여 실측지도(實測地圖)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최한기, 최성환, 신헌 등의 후원자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여러 지도, 특히 비변사의 지도 등을 모조리 수집하여 면밀히 검토하여 우리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훌륭한 지리학자이다.
이 글은 「대동여지도의 독도」에 실려 있는 것인데 1999년에 출간된 『한국 고지도 발달사』(이상태 지음. 혜안)에 약간 손질과 보완이 되어 다시 실려 있습니다.
李相泰(이상태)
1. 고산자의 출생지(出生地)
2. 고산자의 생몰연대(生沒年代)
3. 고산자의 거주지(居住地)
4. 고산자의 당호(堂號)
5. 고산자의 전국답험설(全國踏驗說)
6. 고산자의 옥사설(獄死說)
7. 고산자의 신분(身分)
8. 고산자와 동여도
고산자 김정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고산자의 출생지·거주지·생몰연대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다. 더구나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제작하였고 또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어떻게 썼는지는 더욱 모른다. 대동여지도라는 조선 지리학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긴 고산자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의문 사항이 많을까 ?
이것은 그의 빛나는 업적에 비하여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측과 억측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산자는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 등의 3대지지를 편찬하였고 청구도(靑邱圖),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3대지도를 제작하였음을 밝혀졌으며 그를 둘러싸고 얽혀있는 많은 의문 사항들이 밝혀지고 있다.
1. 고산자의 출생지
고산자의 출생지가 황해도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없다. 황해도 봉산설(說)이 유력하다. 그러나 황해도 토산(兎山)이 고산자의 출생지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쓴 최초의 지지가 동여도지인데 이 책의 편자(編者)에 "월성 김정호 도편(月城 金正浩 圖編)"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름 앞에 씌여진 지명(地名)은 본관(本貫)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김정호는 청도 김씨(淸道 金氏)가 아니라 월성 김씨 곧 경주 김씨(慶州 金氏)인 셈이다.
이러한 의심도 가지만 그러나 여도비지를 살펴보면 이 의문은 풀린다. 이 책은 그의 후원자였던 최성환(崔○煥)과 공저(共著)로, 편자를 살펴보면 "예성 최성환 성옥보 휘집(蘂城 崔○煥 星玉甫 彙輯), 오산 김정호 백원보 도편(鰲山 金正浩 伯元甫 圖編)"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로 본다면 예성은 충주(忠州)이고 오산은 청도이기 때문에 최성환은 충주 최씨이고 김정호는 청도 김씨이다. 그리고 고산자의 자가 백온(伯溫), 백원(伯元) 등이 있는데 백원(伯元)이 그의 자(字)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산자는 동여도지에서는 왜 "오산 김정호"라고 표기하지 않고 "월성 김정호"라고 했을까 ? 이는 대동지지 황해도(黃海道) 토산현조(兎山縣條)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린다. 토산의 옛 명칭이 월성이었다. 그러므로 고산자는 황해도 봉산 출신이 아니고 황해도 토산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2. 고산자의 생몰연대
고산자에 관한 기록이 희소하기 때문에 그의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병도(李丙燾)는 김정호가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까지 4대에 걸쳐 생존했다고 하였다. 그렇다. 고산자는 순조 34년에 청구도를 제작했으며 철종연간(哲宗年間)에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동여도를 제작하였으며 철종 12년에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고 고종 원년(元年)에는 대동여지도를 재간하고 대동지지를 썼기 때문에 이러한 단정은 사실에 부합된다. 그러나 이 정도는 미흡하다. 고산자의 생몰연대를 구체적으로 1804 ∼ 1866년이라고 지적한 연구자는 김양선(金良善)이다. 그러나 김은 고산자가 어떻게 생활했기 때문에 이렇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필자(筆者)는 대동지지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고산자가 고종 3년(1866)까지 생존했음을 밝혀냈다. 대동지지 권(卷)1 국조기년(國朝紀年) 고종조에는 민비(閔妃)가 고종의 왕비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왕들은 세자로 책봉된 후 세자빈을 맞았다가 함께 즉위하지만 고종은 세자 시절이 없이 바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가 없었다. 고종은 즉위하고 3년 후인 고종 3년(1866) 3월에 민씨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이 사실이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대동지지에도 기록하고 있으므로 고산자는 고종 3년(1866) 3월 이후까지 생존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친우였던 최한기(崔漢綺)가 1803년에 태어나서 1877년에 죽었다면 김양선이 지적한 1804년에 태어나서 1866년에 죽었다는 지적은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 고산자의 출생시기는 정확히 밝힐 근거가 없지만 그의 사망시기는 고종 3년(1866)이라고 확실히 지적할 수 있다.
3. 고산자의 거주지
김정호가 황해도에서 언제 서울로 이주했는지 알 수 없다. 고산자는 서울에 상경하여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고산자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정인보(鄭寅普)의 지적이 생생하다. 그는 고산자와 생전(生前)에 면식이 있었던 한세진(韓世鎭)의 대인(大人) 증언을 근거로 고산자가 만리재에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인보의 기사보다 앞서 1925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게재된 내용을 검토해 보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고산자의 유업(遺業)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허(遺墟)가 있는 남문(南門) 밖 약현(藥峴)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추진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본다면 고산자는 약현 부근에 살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대문(西大門)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매우 잘못된 사실이다. 왜냐하면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의 도성도(都城圖)를 펼쳐 들고 위치를 확인해 보면 만리재 너머가 바로 공덕리이기 때문이다. 공덕리는 남대문 밖이지 서대문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약현, 만리재, 공덕리는 서로가 지척의 거리이다. 조선광문회에서 기념비를 세우려고 추진한 점으로 미루어 상당한 고증이 있었으리라고 사료되며 고산자는 약현 부근에 거주했다고 생각된다.
4. 고산자의 당호
김정호는 고산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빈한했고 신분도 미천했다. 그러므로 그가 당호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동지지에 그가 인용한 65종의 사서(史書) 대부분은 최한기나 최성환에게서 빌려온 것이지 그가 소장했던 사서가 아닐 것이다. 오주(五洲)도 최한기가 많은 장서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당시에는 책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좀처럼 장서를 갖출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지구도(地球圖) 중간자(重刊者)가 태연재(泰然齋)라고 표기된 것은 고산자의 당호가 아니라 최한기의 당호이다. 오주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 의하면 최한기가 청(淸)의 장정병(莊廷○)이 간행한 지구도를 입수하여 그는 도설(圖說)은 제외하고 지구도만을 원래 양각(陽刻)인 것을 음각(陰刻)으로 김정호의 도움을 얻어 대추나무에 판각(板刻)하여 중간하였다. 그러므로 지구도의 중간자는 최한기이지 김정호가 아니다. 고산자는 지구도를 판각해 준 각수(刻手)이었지 중간자가 아니다. 태연재는 고산자의 당호가 아니라 중간자인 최한기의 당호이다.
5. 고산자의 전국답험설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백두산을 7회나 등정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고산자의 위대성을 드높이기 위하여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하였다. 이 사실은 조금만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통관계, 경제력, 체력, 맹수들, 어느 것 하나 가능성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굳혀 주는 것이다.
또 고산자가 정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전국을 세 차례나 두루 답사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다음 사료(史料)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자.
가) 癖於輿地之學, 博巧廣蒐(劉在建의 里鄕見聞錄)
- 여지학(곧 지리학, 지도학 등 땅에 관한 학문- 홈지기)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나) 金正浩 年自童冠 深留意於圖志 歲久搜閱 詳諸法之輪○ 每値靜閑時 確論求得比覽式簡便(崔漢綺의 靑邱圖題)
-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 여러 도법에 상세히 알아 매번 조용한 시간에 간편한 비람식을 확실히 얻어......(최한기의 청구도제문)
다) 余嘗有意於我東輿圖 如籌司奎閣之歲古家○○之餘 廣蒐而證定 參互群本 援據諸書 合以○輯 因謀諸金君百源 屬以成之(申櫶의 大東方輿圖序)
- 나는 일찍이 우리 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옛날 집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이 작업을 김백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
위 번역은 필자의 『한국 고지도 발달사』(혜안. 1999)에서 보충.
사료 가)는 유겸산(劉兼山: 곧 유재건 - 홈지기)이, 사료 나)는 최한기가, 다)는 신헌이 쓴 기록들이다. 이 세 사람은 고산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고산자가 전국을 두루 답사하였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다. 세 사람 모두 오로지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集大成)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산자는 博巧廣蒐(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거나 歲久搜閱(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했으며 廣蒐而證定(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하고 參互群本(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하여 청구도나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지 전국을 두루 답사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방동인(方東仁)의 지적처럼 프랑스의 단빌은 프랑스를 한 발자국 나가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6. 고산자의 옥사설
고산자의 옥사설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한 이병도(李丙燾)는 여러 가지 정황을 들어 설명하였다. 즉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지지 등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필자도 옥사설을 밝혀 보려고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추국안(推鞠案)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지만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 사실들은 그의 옥사설을 믿기 어렵게 한다.
첫째,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그가 편찬한 지지가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둘째,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를 옥에 가두고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하여 소각했다고 했는데 현재에도 대동여지도 판목 1매(枚)가 숭실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1931년의 경성대(京城大)에서 전시한 고도서전관목록(古圖書展觀目錄)에 의하면 판목 2매가 전시되었으며 그 외에도 특정인이 수십 매를 비장(秘藏)하고 있다고 부기(附記)하였고 김양선도 대동여지도 판목을 소유했었으며 또 최성환 후손들의 증언에도 대동여지도 판목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대동여지도 판목은 압수당하여 소각되지 않았었다.
셋째, 유재건(劉在建)이 이향견문록에서 죄인 김정호를 수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 권말에 고산자 얘기를 추기(追記)했으며 그 추기 시기는 고산자가 죽은 해 무렵이기 때문이다.
넷째, 고산자와 교유(交遊)하였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비변사 소장의 국가 기밀지도를 제공해 준 신헌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신헌은 중용(重用)되며 자기의 문집(文集)에 대동방여도 서문(大東方輿圖 序文)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을 기초로 한다면 고산자의 옥사설은 일제가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하여 조작한 사실인 듯하다.
7. 고산자의 신분
고산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전기(傳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고산자의 신분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다음 몇 가지 사실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첫째,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고산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에서 이인향선지가칭자(里仁鄕善之可稱者) 중 연몰무전(煙沒無傳)함을 한탄하여 이 책을 편찬하며 그들의 행적을 기리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책에는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 시(詩), 서(書), 화(畵) 등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行蹟)을 모았다. 그러므로 고산자도 하층계급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을 통해서 고산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서문 중 "因謀諸金君百源 屬以成之(해석은 위의 '고산자 전국답험설' 참고 -홈지기)"라고 하였다. 신헌은 순조 11년(1811)에 태어났고 김정호는 순조 3 ∼ 4년경에 태어났기 때문에 연령적으로는 김정호가 연상(年上)이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김정호를 김군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김정호는 신헌보다 신분이 훨씬 못미침을 알 수 있다. 즉, 연하자(年下者)가 연상자(年上者)에게 김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신분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같은 양반 출신이면 김공(金公)이라고 당연히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姓名)을 갖추어 적지 않고 성과 자(字)만을 적은 것도 신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산자의 자가 백원(伯元)인데 백원(百源)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정호는 평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김정호의 족보(族譜)가 없는 점이다. 청도 김씨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고산자는 봉산파(鳳山派)로 분류되어 있는데 6·25 동란으로 인하여 봉산파가 실계(失系)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6·25 동란과 관계없이 구보(舊譜)에는 등재되어 있어야 하는데 고산자는 족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는 김정호의 족보가 6·25 동란으로 실계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족보도 갖지 못했던 한미(寒微)한 평민 출신임을 뜻한다.
8. 고산자와 동여도
동여도는 23규(糾)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 가장 세밀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고산자의 작품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첫째, 동여도지 제 2책에 실려있는 서문을 들 수 있다. 고산자는 이 글에서 지도와 지지를 만들고 이를 동여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지지는 동여도지이고 지도는 동여도를 뜻한 것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의 작품이라고 분명한 간기(刊記)가 있고, 동여도에는 간기가 없지만 실제로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체제가 23규로 되어있고 매규(每糾)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다만 동여도가 대동여지도에 비해 약 7,400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판각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여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선행(先行)지도일 것이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에서 김백원(金百源)에게 위촉하여 동여도를 만들게 하였다고 했다. 김백원은 김정호이고 백원(百源)은 원래 백원(伯元)인 고산자의 자이다. 그러므로 동여도는 김정호의 작품이다.
셋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실려있는 지도표가 정밀하며 매우 흡사하다. 동여도에는 12개의 지도표가 사용되었는데 대동여지도에는 14개의 지도표가 사용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의 항목을 별도로 구분시켰지만 동여도에는 이 세 항목을 주현(州縣), 진보(鎭堡), 성지(城池) 항(項)에 포함시켰으므로 별 차이가 없다. 단지 동여도에는 파수(把守) 항이 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지도표를 뺐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지도표가 동여도의 것보다 간결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는 동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 동여도 제 13규 여백란(餘白欄)에 표기되어 있는 인릉(仁陵)의 위치가 헌릉우강(獻陵右岡)으로 되어 있다. 인릉은 순조의 능으로 원래 교하현(交河縣)에 봉안(奉安)했다가 철종 7년(1856) 2월에 헌릉우강으로 천봉(遷奉)이 결정되어 10월에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동여도는 철종 7년(1856) 이후에 제작되었으며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초간(初刊)한 것이 철종 12년(1861)이니 철종년간에 고산자를 제외하고 이렇게 상세하고 방대한 지도를 제작할 사람이 없으며 그러한 기록도 없지 않은가 ?
다섯째, 이병기(李秉岐)가 사조(思潮) 제1권 제 12호의 부록으로 수록된 한국명저해제(韓國名著解題)에서 동여도를 김정호의 작품으로 분류, 해설하고 있으며, 고대민족문화연구소(高大民族文化硏九所)에서 편찬한 한국도서해제(韓國圖書解題)에서도 이 작품을 고산자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동여도는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한 선행지도임이 분명하다.
고산자 김정호는 황해도 토산에서 출생하여 1804 ∼ 1866까지 활동했으며 그는 백원, 백온, 백원, 등 자도 자세하지 않고 당호도 갖지 못한 한미한 평민 출신이지만 죽는 그까지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도와 지지를 편찬하다 죽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였다. 물론 그는 옥사하지도 않았으며 백두산을 등정했다거나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여 실측지도(實測地圖)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최한기, 최성환, 신헌 등의 후원자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여러 지도, 특히 비변사의 지도 등을 모조리 수집하여 면밀히 검토하여 우리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훌륭한 지리학자이다.
이 글은 「대동여지도의 독도」에 실려 있는 것인데 1999년에 출간된 『한국 고지도 발달사』(이상태 지음. 혜안)에 약간 손질과 보완이 되어 다시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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